이름없는추모제 – 마지막 발언문

” 웹하드에서 한국 여성의 피해촬영물이 사라지기 시작한지 겨우 1년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국산야동’은 웹하드 성인 카테고리의 메인 콘텐츠였다.

수많은 피해촬영물이 웹하드 추천게시물 리스트에 상위 랭크되었다.

 

당시 사회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피해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국가적인 대책이나 제도도 없는 상태로,

여성들은 ‘문란하다’, ‘당해도 싸다’는 등의 낙인이 찍힌 채 사람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피해 도망쳐야 했다.

 

그때 죽었던 여성들의 일은 개인의 비극으로 읽히거나 자극적인 소재거리로 편집되어 또다시 판매되었다.

 

오늘 우리는 첫 추모제를 열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적 촬영물 비동의 유포를 성폭력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던 과거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이뤄낸 것도 많았으나 잃은 것도 많았다.

싸움은 불가피하게 싸움의 주체에게도 생체기를 남긴다.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에는 받은 줄도 몰랐던 상처를 돌보고, 서로를 바라보고,

위로하고, 눈물 흘렸던 하루의 끝에서, 또다시 ‘국산 XXX’로 소환될까봐 이름을 알아도 부를 수 없는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동안 당신을 위해 싸운 사람이 아주 많았다. 1년 만에,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붉은 색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혜화역과 광화문을 당신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우리 사회는 당신의 죽음을 재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이버성폭력 피해경험자의 죽음을 다시 명명할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살자 1로 집계되었을 당신의 죽음은 타살 사건이었다.

 

여성 피해자만을 탓하며 영상 속 사람이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유작’이라고 키득대는 문화 구조가 당신을 죽였다.

이미지 착취로 돈을 버는 산업 구조가 당신을 죽였다.

 

너무 큰 힘에 의해 쓰러지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아픈지,

이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 혼자 알기 어렵다.

 

시야를 다 가릴만큼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 압도되어 어디에도 화살을 돌릴 수가 없어서

스스로의 안을 파고들어 찔러야 했던 당신에게 오늘의 꽃과 불빛이 조금이나마 의미가 되길 바란다.

 

타살은 또 다른 사람의 개입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다.

국가가 불법촬영물을 유통하여 돈을 버는 온라인 공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사람들이 피해자를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되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우리는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막겠다.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있는 당신들을 기억할 것이다.

기억하고 싸우고 바꿔내는 일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 이름 없는 추모제 후기

“저는 동의 없이 성적 촬영물이 유포된 성폭력 피해경험자를 지원하는 활동가입니다.

수화기 너머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한사성에서 피해지원을 시작했을 때,  정말 잘 해내고 싶었고 스스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과 귀로 피해를 간접 경험하게 되면, 같지는 않겠지만 마치 피해 당사자와 유사한 통증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통증이 다양한 결로 한꺼번에 짓누르듯 느껴져서 이성적으로 왜 아픈지 하나하나 떼어내 살펴보기 어려웠습니다.”

 

 

“피해지원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력감이었습니다.

법제도의 공백이 마치 저의 탓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실함이 너무 무거워서 감당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피해경험자의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저도 마음을 졸였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이제 다 끝났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어

복숭아씨를 삼키듯 억지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번져나가는 피해를 막을 재간이 저에게 없단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피해경험자가 원하는 것처럼 당장 피해촬영물을 다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가해자를 바로 잡아들여 처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중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안전해질 수 있는 정답이 있어서 쉽게 방법을 알려주면 좋을 텐데, 원하는 답변을 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원자로서의 제 과실이 아니고 저는 구원자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한 사람의 고통의 무게를 나눠지는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갖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늘 저의 모자람이 뼈아팠고 노력과 정성에 비례해서 피해경험자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끌어안으려고 손깍지를 껴도 줄줄 새어나가는 자매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미니즘을 알고 저의 세계가 깨지는 경험을 했지만,

피해지원을 하며 다시 그 세계가 조각나고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복원되는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원하는 세상을 꿈꾸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면, 피해지원은 예측할 수 없는 미로가 눈앞에 펼쳐진 느낌입니다.

막다른 길에 일일이 부딪혀가며 저의 세계로 피해지원을 소화해내는 것은 꽤 고독하고 치열한 일이었습니다.

한 번의 실수가 책임질 수 없는 문제를 초래할까봐 항상 불안했고 아무리 업무가 과중해도 미룰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종종 제가 지원하던 피해경험자가 죽는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그동안 연락이 잘 되던 피해경험자가 갑자기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죽음을 떠올리며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이 사람의 죽음을 가장 경계하던 제가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것은 모순적이면서도 사실적입니다.

반성폭력 활동가이자 지원자로서 ‘피해자’와 ‘죽음’을 함께 나열하는 것은 마치 부정을 저지르는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사이버성폭력 피해로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막지 못한 그의 죽음이 너무 아파서 말하기 힘들어도 나와 같았던 한 여성이

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새기는 것은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조차 또 다른 고통이었을지 모를 이름 없는 그들을 마음 깊이 추모하며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한 번 더 어깨를 내어주고 여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과 싸울 것입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지원자가 아닌 죽어간 당신의 자매로서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입니다.

우리는 여성의 신체로만 읽히는 존재들이고 당신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입니다.

당신이 다시 힘을 내어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한 고통의 과정 그 어디에도 당신의 과실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스스로를 탓하며 아팠을까봐 늦었지만 이제라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추웠던, 그리고 뜨거웠던 1월의 광화문 광장. 이름 없는 추모제에 약 200명에 가까운 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2019.01.30 이름 없는 추모제

#이름_없는_추모제

*사진: 페미니스트 사진그룹 유토피아 박이현 작가

1월 30일, 이름 없는 추모제 안내

수요일 저녁, 광화문 광장에서 이름 없는 추모제가 진행됩니다.

 

추모제에 함께 해주시는 분들은 헌화할 꽃이나 초를 준비해주세요.

못한 분들께는 미리 준비된 꽃과 초를 나누어드립니다.

 

추모제 참여신청
http://bitly.kr/gfk4r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은 추모 의견을 남겨주세요.

이렇게 모인 추모 의견은 방송통신위원회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https://govcraft.org/campaigns/149

이름 없는 추모제 – 그 애는 2017년 8월 1X일 새벽에 죽었습니다.

그 애는 2017년 8월 1X일 새벽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 애가 웹하드에서 자신의 동영상을 발견한 후부터 자살하기까지 3개월간, 그 애가 거의 유일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더는 안 되겠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과 동행해 그 애 자취방의 문을 따고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구급차 안에서 그 애 핸드폰으로 부모를 부르고 그 애가 숨이 끊어진 순간 병원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애 장례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제대로 추모하고 애도한 적이 없습니다.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이 자리에서 별로 정갈하게 그 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죽음은 나에게 마음 정리가 채 다 되지 않은 일이고, 그런 일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고 그 의미를 따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찰도, 법조인도, 관련 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그저 디지털성폭력 이슈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편인 일반인입니다.

사실 그 애와 절친한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그 애는 경찰, 법조인, 관련 업계 종사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서

친하지도 않은 저에게 겨우 연락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 애가 알고 있던 세상에서는, 그 정도로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이해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애는 왜 그런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겁니까?

 

 

나도 그 애 장례식장에 가서 슬피 울고 추모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경찰도, 법조인도,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입니다.

그 전 3개월 동안 그 애 옆에 있어주고 지지하고 보조자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제 일상은 충분히 망가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애가 죽은 날 아침에 출근하고, 그 다음 날, 그 다다음 날도 출근을 해야하는 일반인이었습니다.

나는 힘에 부치게 했는데 뭐가 모자랐던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아니 사실 내가 모자랐던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데,

그러면 결국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과호흡을 겪고 몇 번 쓰러지기도 하면서 우선 그 일로부터 거리를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비극 때문에 생업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요. 개인 단위로는 감당할 수 없고, 개인의 일상이 망가질 만한 폭력을 왜 법과 행정이 맡지 않았던 겁니까?

 

 

마지막으로, 그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 애는 처음 도움 요청을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기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불안증으로 덜덜 떨면서도 굳이 밖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애가 죽던 날 새벽에야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건 그 방이 그 애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개월 전에 봤던 방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창문에는 깼다가 다시 테이프로 붙이고, 그걸 다시 깼다가 그 위에 또 테이프를 덧바른 흔적이 무수히 있었습니다.

 

책상, 의자, 침대, 노트북, 벽 등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부쉈다가 테이프를 발랐다가를 반복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애는 매일매일 죽으려고 했다가 살아보려고 했다가 또 죽으려고 했다가 다시 살아보려고 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2017년 8월 1X일에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애는 그해 5월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죽임당해서 그날 마지막 숨이 끊어졌을 뿐입니다.

 

 

살고 싶었던 그 애를 매일매일 죽이던 것들을 기억합니다.

 

‘맛있어 보인다’  ‘저런 XX를 입고 다니는 년들은 걸레더라’  ‘내가 본 국산 탑10에 든다’

‘X살 있어서 좋다’  ‘아니다 싫다’  ‘질질 싸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어느 학교 애다’  ‘그 학교 다니는데 찾아봐야겠다’

 

그 외에도 수천 개가 있지만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댓글을 달 수 있었던 겁니까? 누구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왜 그 애를 죽이고 내 일상을 파괴하도록 방관했습니까?

 

 

오늘 이 자리는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들의 추모제라고 알고 왔습니다.

어차피 늘 숱하게 일어나는 일,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새삼스러운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애의 이름을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늘 XX이에게, 지금까지 너의 죽음을 어느 정도 회피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XX이의 명복을 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들이

죗값을 받을 수 있도록 지금 이상으로 싸울 것임을 약속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월 30일, 이름 없는 추모제에서 낭독 혹은 대독될 글.
익명의 한사성 회원이 보내 주셨습니다.

 

눈물 흘리거나 추모할 틈도, 상처를 돌볼 시간도 없이

누구의 답장도 위로도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름이 있어도 부를 수 없는 피해자를 위해

우리 곁에 언제나 있었던 어떤 죽음을 위해

온라인 추모 페이지에 하고 싶은 말을 남겨 주세요. 추모제 당일날, 남겨진 목소리의 수 만큼 꽃을 놓아드립니다.

 

 

#이름 없는 추모제

온라인 추모 페이지 링크->
https://govcraft.org/campaigns/149

더 많은 분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게시글을 공유해주세요. 추모 메시지들은 방송통신위원회에 전달됩니다.

이름 없는 추모제 – 죽음에 이른 불법촬영 및 비동의 유포 피해자를 기리며…

우리는 피해자의 죽음에 시선이 집중되는 일은 사이버성폭력 근절 운동의 좋은 방향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모든 피해자가 죽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썼다.

 

지난해 가을,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5년 8월 7일, 메르스 갤러리 저장소 사용자들이 모여 메갈리아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2015년 10월 이후 메갈리아의 소라넷 고발 활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2016년 4월에 소라넷이 폐쇄되었다.

그때 처참한 사이버성폭력의 현실을 처음 목도한 많은 여성은 ‘죽음’을 익숙한 표현으로 삼았다.

실제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기도 했고, 우리의 삶이 이런 종류의 죽음에 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8년 9월인 지금,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올리는 공론화 게시글에도 아직 그런 맥락의 댓글이 달린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사이버성폭력 때문에 사람이 죽어요’ 이상의 언어가 필요하다.

정상적인 세상이라면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에서 여성의 죽음은 중요한 일로 다뤄지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의 가해로 인해 죽었다고 했을 때 강조되는 것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다’는 메시지와 피해자는 죽을 만큼 약하고 불쌍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말해 봤자 큰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던 그런 순간들이 괜찮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일부터 이름 없는 추모제 안내 게시글이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