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위한 압력, 서울시여성가족재단 토크콘서트 대본

#TimesUp #PressforProgress 이제는 끝, 변화를 위한 압력.

서울시여성가족재단 토크콘서트를 위해 서랑과 리아가 함께 만들었던 대본입니다.

여러분이랑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조금 길지만 천천히 읽어주세요.

 

💜🖤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이어져나가는 중입니다. 이후의 반동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우리 안에 충만한 연대의 힘을 느낍니다. 더욱 더 강한 자들, 더 많은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들이 고발당할수록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이 운동으로 인해 한 단계 나은 지평이 열릴 수도 있겠다는 희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언어가 있고, 말 할 수 있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 불쾌하고 고통스러웠던,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던 경험들이 ‘성폭력’이라고 외칠 수 있는 때가 왔음을 감지합니다.

 

이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미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몰카’라는 키워드를 모르시는 분들은 없겠죠. 지난 몇 년 동안 소위 몰카라고 불리는 촬영형 성폭력 문제는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얻었습니다.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불법촬영 뿐만 아니라 연인 간 동의하에, 혹은 동의 없이 촬영된 성적촬영물 제작과 그 유포 모두 몰카 범죄로 통칭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촬영형 성폭력은 촬영만 진행되었을 때와 사이버 공간에 유포되었을 때의 성격이 매우 달라, 한 단어로 묶어내기 부적절합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성폭력은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으로 접근해서는 그 특징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촬영물을 이용한 사이버 성폭력은 ‘여성혐오적인 문화’와 ‘시선’으로 구성된 폭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너와의 성관계 촬영물을 유포할 거야, 너의 누드 영상을 유포할 거야 같은 말이 협박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범죄를 예고하는 사람을 당당하게 고발할 수 없고, 물리적인 폭행이 없더라도 위협받게 되는 이유가 뭐죠?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누구든 볼 수 있는 사이버 공간에 신체 촬영물이 올라간다는 것은 어째서 이토록 커다란 공포가 되었을까요?

 

촬영에 동의를 했든 하지 않았든, 일단 사이버 공간에 촬영물이 유포되고 나면 여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여성이 타격을 입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성행위를 해도 여성만을 집요하게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성폭력이 일어나는 현장을 ‘포르노’로 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집중합니다. 이 피해자가 진정한 피해자인가? 이 피해자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큼 불쌍한가? 이 피해자는 순결한 피해자가 맞나? 끊임없이 피해자를 쳐다보며 묻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사이버성폭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치마속 몰카와 같은 공공장소의 불법도촬 피해의 경우, 경찰신고 등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하고 언론을 통한 공론화까지 바라시는 피해자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큼 어쩔 수 없이 범죄를 당했고, 진정하고 순결한 피해자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관계 영상 유포 피해의 경우는 다릅니다. 피해자가 성관계에 적극적으로 응한 경우, 그녀는 오히려 문란한 여성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그러게 왜 그런 남자를 만났어? 그러게 왜 찍었어? 너도 즐긴 거 아니야? 피해자가 어떤 여성이든 상관없이 동의 없이 유포한 가해자가 문제라는 명백한 진실은 너무나 쉽게 지워집니다. 그들은 진정한, 순결한 피해자 프레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관계 영상 유포 피해자분들은 저희 단체에 피해상담을 받는 것조차도 타인에게 본인의 피해사실을 더 알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망설이다가 연락을 주십니다. 또 가족이 알게 될까봐, 직장동료들이 알게 될까봐, 남성경찰들이 촬영물을 돌려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경찰 신고는커녕 여성단체에서 상담 받을 용기조차 못 내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론화는 당연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이번 미투 운동의 불길이 이어질 때 여러 언론사에서 저희 단체에 연락을 주셨습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자분들 중에는 ‘미투(MeToo)’ 운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피해자가 없으신지, 혹은 공론화를 원하는 피해신고가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행위를 자발적으로 했는가, 성관계 동영상을 동의하에 찍었는가 아닌가, 누드 촬영물을 셀피로 찍었는가에 따라 똑같이 유포된 경우라 할지라도 피해가 다르게 구성되는 사이버성폭력 피해자들은 미투 운동에 동참하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물리적인 성폭력은 불완전하게나마 받아들여질 토양이 만들어졌지만 사이버 성폭력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내가 성관계 촬영물 유포 피해자라고 얼굴과 신상을 드러내며 고발하는 순간 그 피해촬영물은 누군가의 하드디스크, 누군가의 드라이브, 누군가의 핸드폰에서 온라인 공간으로 올라와 성적으로 소비되고 또 모욕당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을 만큼 의식개선이 이루어지고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을 듣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예전엔 물리적인 성폭력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지금 사이버성폭력이 그런 것처럼, 모두가 폭력 사건을 섹스로써 들여다보고 피해 여성만 다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뉴스에서 성폭행 당한 후 자살한 여성을 보도하며 정절을 지켰다고 칭찬한지 아직 2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MeToo를 했으면 ‘더럽혀진’ 여성들이 왜 아직 자살하지 않았는지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었겠죠.

하지만 앞서 활동해주신 페미니스트 분들 덕분에 ‘이것은 섹스가 아니라 폭력이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들이 피해자와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토양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이 큰 파도가 지나간 후에는,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아직 ‘진정한 피해자’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도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이라고 외칠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할 것입니다.

 

MeToo 운동으로 드러난 것들은 몇몇 괴물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뿔 달린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바로 옆에서 함께하고 마주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라는 점을 직시합시다.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이 깊은 뿌리 끝에는 여성혐오와 가부장제, 강간 문화 등의 끔찍한 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이 안전할 수 있는지 여부는 우리가 이것들을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근본적인 사이버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최근 안희정 도지사의 사과문에 “몰카 찍은거 있으면 올려라. 봐야 인정한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확인해보니 서울시 시장과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은 더불어민주당 당원이었습니다. 성폭력을 고백하는 자에게 사이버성폭력을 한 번 더 행하라고 제안하는 진보 지식인 남성을 바라보며 한사성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를 줍는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이 곧 해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