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 이름 없는 추모제 후기

“저는 동의 없이 성적 촬영물이 유포된 성폭력 피해경험자를 지원하는 활동가입니다.

수화기 너머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한사성에서 피해지원을 시작했을 때,  정말 잘 해내고 싶었고 스스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과 귀로 피해를 간접 경험하게 되면, 같지는 않겠지만 마치 피해 당사자와 유사한 통증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통증이 다양한 결로 한꺼번에 짓누르듯 느껴져서 이성적으로 왜 아픈지 하나하나 떼어내 살펴보기 어려웠습니다.”

 

 

“피해지원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력감이었습니다.

법제도의 공백이 마치 저의 탓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실함이 너무 무거워서 감당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피해경험자의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저도 마음을 졸였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이제 다 끝났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어

복숭아씨를 삼키듯 억지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번져나가는 피해를 막을 재간이 저에게 없단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피해경험자가 원하는 것처럼 당장 피해촬영물을 다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가해자를 바로 잡아들여 처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중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안전해질 수 있는 정답이 있어서 쉽게 방법을 알려주면 좋을 텐데, 원하는 답변을 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원자로서의 제 과실이 아니고 저는 구원자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한 사람의 고통의 무게를 나눠지는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갖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늘 저의 모자람이 뼈아팠고 노력과 정성에 비례해서 피해경험자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끌어안으려고 손깍지를 껴도 줄줄 새어나가는 자매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미니즘을 알고 저의 세계가 깨지는 경험을 했지만,

피해지원을 하며 다시 그 세계가 조각나고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복원되는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원하는 세상을 꿈꾸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면, 피해지원은 예측할 수 없는 미로가 눈앞에 펼쳐진 느낌입니다.

막다른 길에 일일이 부딪혀가며 저의 세계로 피해지원을 소화해내는 것은 꽤 고독하고 치열한 일이었습니다.

한 번의 실수가 책임질 수 없는 문제를 초래할까봐 항상 불안했고 아무리 업무가 과중해도 미룰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종종 제가 지원하던 피해경험자가 죽는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그동안 연락이 잘 되던 피해경험자가 갑자기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죽음을 떠올리며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이 사람의 죽음을 가장 경계하던 제가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것은 모순적이면서도 사실적입니다.

반성폭력 활동가이자 지원자로서 ‘피해자’와 ‘죽음’을 함께 나열하는 것은 마치 부정을 저지르는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사이버성폭력 피해로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막지 못한 그의 죽음이 너무 아파서 말하기 힘들어도 나와 같았던 한 여성이

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새기는 것은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조차 또 다른 고통이었을지 모를 이름 없는 그들을 마음 깊이 추모하며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한 번 더 어깨를 내어주고 여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과 싸울 것입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지원자가 아닌 죽어간 당신의 자매로서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입니다.

우리는 여성의 신체로만 읽히는 존재들이고 당신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입니다.

당신이 다시 힘을 내어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한 고통의 과정 그 어디에도 당신의 과실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스스로를 탓하며 아팠을까봐 늦었지만 이제라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추웠던, 그리고 뜨거웠던 1월의 광화문 광장. 이름 없는 추모제에 약 200명에 가까운 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2019.01.30 이름 없는 추모제

#이름_없는_추모제

*사진: 페미니스트 사진그룹 유토피아 박이현 작가